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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친구 - 탓치

탓치 2009. 12. 28. 04:13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다. 집에서는 혹여 터지지나 않을까, 테이프로 꽁꽁 동여맨 옷 보따리를 보내왔다. 어머니가 지난 해 얼음이 풀릴 때 차곡차곡 개어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을 그 옷에서는 착각인지는 몰라도 집 냄새가 났다. 분명 정이 그리운 게다. 대학생이 되어 정신없이 이 년을 보내고 나니 남은 것이라곤 성적표뿐이다. 다독여줄 부모님도 옆에 없고, 함께 즐거워할 동생도 없다. 새삼스럽게 타지에 나와 있음을 실감한다.

그 날은 눈이 내렸다. 오래된 옷에서 잔털이 떨어지듯 조그맣고 하얀 눈이 보풀보풀 내렸다. 손에 닿자마자 사그라지는 눈알맹이는 너무나도 가냘파서 한껏 눈으로 좇아보아도 땅에 닿으면 이내 녹아내렸다. 그래도 겨울이라고 나무에 걸린 노란빛 전구들을 보며 걷다보니 이내 땅에 쌓인다. 하얗게.

그 날의 나는 왠지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시험 기간 동안 종일 우울했던 기분을 풀기 위해 선배의 밴드공연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이번에 새로 결성된 신생 밴드라 했다. 훗날 대성할지도 모르는 한 밴드의 처녀 공연에 참여한 셈이다. 선배들이 공연 내내 흘리는 땀은 계속 빛이 났다. 조명이 무대를 한번 휘감을 때마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때만큼은 그들이 선배가 아닌 남자로 보였다. 같은 남자인데 그들은 무대 위에, 나는 객석에 앉아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날의 나는 왠지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아니, 한 무리의 땀이 빛나는 공연 후에 그렇게 되었다는 표현이 옳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은 복잡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먹었는지 털 코트에 양껏 냄새가 났고 어떤 사람은 연말연시 술 한 잔 하셨는지 연신 비틀댔다.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복잡한 곳에선 멀미하기 일쑤인 나는 답답함을 참으며 어렵게 비집고 들어가 경로석 앞에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4년의 짧은 지하철 인생에서 깨달은 건, 사람 많을 땐 경로석 앞이 최고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경로석 가운데 자리가 비어있다. 나의 50년 후를 위한 예약석이라는 문구가 따갑게 양심을 찌른 탓인지 하루 종일 걸은 다리가 욱신욱신하며 내게 불평을 해도 꼿꼿이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빈 경로석에 턱하니 앉는 것이다!

경로석이 아무리 노약자를 위한 자리라지만 꼬맹이가 앉는 것은 본적이 없었다. 50년 후라 해보았자 50대, 한창 잘나갈 때일 어린놈이 턱하니 앉는 꼴이라니. 그 자린 내가 70대 돼서 앉을 자리다 이 녀석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아이가 알아듣지 못할 건 자명한 사실일뿐더러, 그 옆엔 자상한 표정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서계셨다.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마음을 뾰로통한 입술로 대신했다. 어머니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나였기에 별 수 없었다. 열심히 그 놈 눈을 째릴 수밖에.

제 키 반만 한 쇼핑백을 보물인양 끌어안은 남자 아이 옆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계셨다. 30년 전에는 힘깨나 쓰는 장정이셨을 덩치에 얼굴에는 스쳐간 세월을 대변하듯 주름이 크게 줄기 치는 할아버지는 아이를 보자마자 덥석 얼굴을 잡으신다. 그 큰 손에 얼굴이 턱하고 파묻히니 아이는 버둥대고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괘씸한 녀석, 드디어 혼나는구나. 나이 지긋하신 분이니 아이 엄마도 뭐라고 못하겠지. 하지만 할아버지의 환한 웃음을 보니 괜한 기대였나 싶다. 아이를 연신 귀엽다고 쓰다듬는 할아버지다. 요즘 초등학생은 무섭다던데. 아니나 다를까 그 녀석이 빽 소리를 지르며 할아버지 머리를 탁하고 때린다. 예의를 중시하는 집안에서 자란지라 곧 죽어도 지킬 것은 지키는 나에겐 또 다른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 소심하게 눈알을 부라리는데, 할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고만 계신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약주한잔 하신 모양인데 술기운에 넘어가신 것일까. 아님 정말 무례한 아이의 행동이 귀엽게만 보이는 것일까. 난 다시 아이를 째린다.

그 녀석은 가방에서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먹기 시작했다. 원뿔 모양으로 된 그 초콜릿은 꼭지 부분에 가느다란 종잇조각이 달려있어, 그걸 당기면 껍질이 벗겨진다. 어렸을 때 많이 사먹었던 기억이 있는 초콜릿이다. 조물조물 껍질을 벗겨 입에 쏙 넣고는 껍질을 두 손으로 돌돌 말아 쇼핑백으로 던져 넣는다.

아이는 잠시도 가만있지 못했다.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잠시 창밖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질렸는지 이내 돌려 앉는다. 그래도 지하철 타본 것이 처음이 아닌듯한 폼이 서울 사람은 다르지 싶었다. 다시 쇼핑백을 뒤적인다. 초콜릿을 입에 툭, 던져 넣고는 부스럭부스럭 한참 무언걸 찾더니 번쩍번쩍 빛이 나는 로봇상자를 꺼낸다. "위잉, 칙." 아직 포장도 벗기지 않았으면서 꼭 로봇이 하늘을 나는 양 효과음도 내며 노는 모습이 꽤나 아이다웠다. 10년 뒤 나도 아이가 생기면 장난감을 꼭 사줘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고 녀석, 다시 할아버지를 괴롭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할아버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볼에 바람을 가득 넣고는 다가서는데 할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고만 계신다. 그러더니 갑자기 할아버지 볼을 꽉 쥐는 게 아닌가! 그 작은 손으로 꼬집어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할아버지도 심술이 나셨는지, 아니면 같이 놀아주려 그러셨는지 아이의 볼을 콱 꼬집는다. 그러자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며 손을 뿌리치는 아이는 심통 가득한 얼굴로 돌아앉는다.

아이는 끝내 바깥 풍경에 싫증이 났는지 자리에 앉아 초콜릿만 연신 넘겨댔다. 가면 갈수록 초콜릿이 바닥을 내는지 뒤적거리는 시간도 늘어갔다. 짧은 팔 탓에 쇼핑백 바닥이 잘 닿지 않아 고개를 위로 쳐들고 낑낑대야 하나씩 건져졌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노동의 값진 결실일 터였다. 그러다 갑자기 할아버지에게 냉큼, 하나를 건넨다.

"이거 나 주는 기가?"

아이는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꼬마 녀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초콜릿을 받았다. 하지만 손톱이 다 뭉개진 무딘 손끝으로 껍질을 까려니 힘겹게 보인다. 갑자기 전란에 손가락 하나가 잘려나간 자리가 시큰하시다 하시던 우리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끝에 달린 종잇조각만 당기면 되는데. 하지만 난 극장에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처럼 바라보고만 있다. 난 제 3자니까.

무슨 생각인지 아이도 묵묵히 할아버지가 애쓰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다 갑자기, 초콜릿을 다시 뺏어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까줄게."

친구한테 하듯 친근한 한 마디. 할아버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아이는 능숙한 솜씨로 껍질을 벗기더니 자랑스레 내민다. 할아버지는 서툴게 받아들고는 한번 빙긋 웃고 입안에 쏙 넣으셨다. 부드러운 미소로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영락없이 자상한 할아버지다.

아이는 계속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어디가?" "집에 가지." "집이 어딘데?" "수원." "수원이면 머나?" "멀지. 한참 가야된다." "우리 집은 서울." "서울 어디." "그건 모르겠어." 아이의 반말을 고깝게만 보았던 나는 스르르 맘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할아버지께 드린 초콜릿이 마지막이었는지 꼬마 녀석은 손 안의 껍질만 만지작거린다.

내릴 때가 되었는지 아이의 어머니가 분주해진다. 아이도 노선도를 읽을 줄 아는 체하며 눈가에 주름을 잡아 노선도만 뚫어져라 보더니, 탁, 하고 일어선다. "나 갈게. 잘가" 할아버지는 아이를 그저 한 번 아이를 꼭 껴안고 아무 말씀 없으시다. 할아버지께 고개 인사를 하는 어머니의 웃음이 정겹다. 어머니 손을 잡고 뒤뚱뒤뚱 걸음걸이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과 친구가 되어 돌아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듬직해 보였다.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다시 지친 모습으로 주무시고 계셨다. 녀석과의 한 시간이 꽤나 즐거우셨는지 입사에 살짝 웃음이 번진다. 아님 의기소침했던 내 기분이 나아진 탓에 그렇게 보였을 뿐일까.

환승역에 도착하자 자리가 났다. 다른 사람에게 뺐길까싶어 얼른 가서 앉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Muse의 <New born>을 찾아 볼륨을 높인다. 요새 중독되다시피 듣는 음악이다. 고개를 드니 내 앞에 놓인 것은 다시 익숙해진 지하철 풍경이었다. 네모반듯한 상자 안에 갇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그 속에 녹아든 나. 닫히는 문틈으로 30대 초반의 회사원이 들어오더니 용케 비어있는 앞자리에 앉는다. 옷매무새를 추스르는 모습을 눈여겨보는데 고개를 드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우리는 황급히 눈을 돌린다. 난 눈 마주치기가 무서워 창밖만 바라보는 현실로 다시 돌아온 게다.

아, 어두운 창밖으로 비치는 가로등 빛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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