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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기차 - 양반탈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11. 3. 16:14

10월 4일.
1)

한 꼬마가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멀리서 고향에 와서 이제 멀어지는 길. 기찻길 몇 줄을 눈 앞에 두고 전화를 건 할머니의 목소리가 굳이 전화기를 갖다 대지 않아도 잘 들리는 듯 하다. 전화를 살짝 들고선 요란하게 할머니를 부른다.

다른 꼬마가 전화를 받으려 앵앵대는 통에 마지못해 전화기를 건네 준 후에 또 서로 계속 안녕히 계시라며 고개를 연신 꾸벅인다.

다른 기차가 한차례 쌩 하고 지나가더니, 그 후에도 다시 아이들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댄다.

할머니의 주름진 웃음에 약간의 이슬이 어려 보이는 것은 왜일까.

오늘따라 다가오는 기차의 울음 소리가 차다.


2)

아빠와 동생, 그리고 내가 여수에서 추석 연휴를 마치고 서울로 기차를 타고 올라가던 길이었다.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던 것은 남원역이 마지막이었다.

그리 멋지지도,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아빠가 앉아있던 자리에 동생을 앉히게 만들었다. 물론 급히 기차표를 끊느라 한 표밖에 구하지 못한 우리 가족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자리를 원래대로 만들어 놓으니 남는 자리는 아빠가 앉던 자리 하나 뿐이었다. 이놈의 철부지 동생은 아빠와 내가 서로 앉으라는 통에 덥썩 앉아버렸다. 그냥 앉은것도 아니고 요놈의 동생님은 어느 새 다리를 쩍 벌리고 두 팔을 활짝 핀 채로 잠이 드셔 버렸다.

아빠가 날 걱정할 까, 지하철보단 훨씬 편하다는 소리를 해 보고, 심지어 핸드폰 시계를 볼 때마다 어느 새 30분 씩 간다는 맘에 없는 소리도 해 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 새 동생 옆자리의 남자도 킥킥대는게 얼핏 보인다. 아빠는 남자가 아까부터 책을 보던 것을 유심히 보더니 위쪽의 등을 켜 주었고, 내가 너무 떠드는 듯 하자 자리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동생이 깼다. 녀석은 주변에 아무도 없어도 불안해 하지 않고 다시 잠을 자려 했다. 무서운 놈. 철부지 같은 녀석을 좌석에서 떼어내고 아빠를 다시 앉히려 실랑이를 벌이자 요놈이 다시 또 잽싸게 앉는다. 그렇게 몇 분 있다가 기회를 잡아서 녀석을 떼어낸 후에야 아빠를 앉혔다. 아빠의 다리에 앉아서 다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동생이 저녁 시간이 지났다는 신호를 보내고, 식비를 받아 냉큼 식당칸으로 달려간다.

추석 끝자락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빈다. 그런 사람의 물결 사이를 지나 동생이 도시락 두 개를 가져왔다. 동생은 냉큼 바닥에 자리를 마련해 넉살좋게 먹기 시작했고, 아빠는 내게 자리를 앉혀 먹게 했다.

힐끗힐끗 내 동생의 밥을 보나 했던 옆자리의 남자가 갑자기 주섬 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꼬마야"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별 반응이 없어 두어번 부르자 그제서야 자신을 부른 줄 알고 녀석이 수저질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형이 좀 심심해서 저기서 서 있으려고 하는데 여기 앉아서 먹어."

녀석이 멍 하더니 이내 헤죽 웃었다. 놀란 내가 동생 대신 말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듣는 둥 마는 둥 선반 위의 짐마저 챙겨 열차칸 사이로 나갔다.

그 후엔 서울까지 누구도 그 자리에 와서 표를 내밀며 앉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집까지 가는 열차엔 그리 멋지지도,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 남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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