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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에서 느낄 수 없는 것

탓치 2009. 11. 5. 18:12
'그'가 젊었을 때만 해도 멀리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화를 통해야 했다. 요즘에야 핸드폰이다, 메신저다 하여 거리에 관계없이 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지만 그 때는 달랐다. 핸드폰은 그 가격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많이 보급되지 않았고, 컴퓨터는 다룰 줄 알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전화기는 투박하고 색 바랜 흑백 사진 같은 느낌의 아날로그 식이었다. 그 작은 전화로 서울에 일자리를 구하러 간 삼촌과, 옆 마을로 시집간 누나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정말 신기했다.

그가 어른이 되니 이제 각 집에 전화기 하나쯤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그녀에게 가끔 전화를 하곤 했다. 전화는 상대방의 얼굴, 몸짓을 보지 못한다는 것일 뿐, 일상대화와 똑같다. 전기 신호로 변환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전화기에 다다르면 다시 본디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이란 걸 알고 있기에, 그는 한 마디 말을 함에 있어 직접 대화를 나눌 때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전화를 하다보면 수화기 저편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녀는 그의 생각을 잘도 읽어 냈다. 그 작디작은 전화기 속에서 그의 얼굴을 훔쳐볼 수 있다는 듯이. 그 또한 그녀의 마음을, 그녀의 생각을 고막으로, 달팽이관으로, 자그마한 떨림과 함께 이해할 수 있었다. 가느다란 선과, 전화기 두 대와,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작은 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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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10년이 되지 않아 세상이 바뀌었다. 공중전화조차 명물이 되어갈 무렵, 그도, 그녀도 핸드폰을 가지게 되었다. 핸드폰의 요금은 매우 비싸다. 30분, 40분 핸드폰을 붙잡고 통화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기엔 그의 지갑은 너무나도 얇았고, 그 얇은 지갑 사이로 핸드폰 문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문자는 정말 싸다. 문자 한두 통쯤이야 밥알 한두 알 흘리는 것만큼 별 볼일 없다. 그녀에게 보내는 문자 한 두 통 쯤이야 폰타 300타를 자랑하는 그에게는 장난이다. 그는 너무도 바쁘다. 자기 개발과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의 풍토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처리하고,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 데에 바쁘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두 통의 문자는 값어치가 없다. 두두두 치고, 버튼 하나면 전송 완료. 상대방의 진의와 감정을 읽을 새도 없이 손은 기계적으로 문자를 적고, 머지않아 ‘전송완료’ 메시지를 띄운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 '어떻게 보냈더라' 긴가민가 하여, 보낸 문자함을 뒤적거리는 날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이제 그녀는 너무 멀리 있다. 기술의 진보로 인해 그와 그녀의 관계는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핸드폰 속에서 그녀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로 세로 4cm의 자그마한 창속에 깜빡이는 그녀의 문자는 그에게 더 이상의 전율을 주지 못한다. 80자의 문자 제한 속에서 감정은 빛을 잃고 의미만이 살아 그를 조롱하고 있다.

주어, 동사의 구분은 사라진지 오래다. 압축률 99%를 자랑하는 그녀의 자그마한 두 손가락이, 예전에는 A4용지 한 장에 빽빽이 써서 주었을 편지를, 한 시간 동안 눈물콧물 흘리며 전했을 이야기를, 손톱만한 상자에 구겨 넣어 그에게 건낸다. 그의 눈은 잠시 문자로 향한다. 그는 이내 핸드폰을 덮는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나는 그의 손에 들려진 핸드폰을 잠시 바라보다가 호주머니에서부터 울려오는 진동에 놀랐다. 언제나 핸드폰은 예고 없이 나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 중 절반 이상이 스팸이라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엄지손가락이 10개의 숫자판 위에서 탭댄스를 춘다. 언뜻 보면 의미가 없는 그 동작은 흰 색 바탕에 새로이 글자를 창조해낸다.

나는 지금 답장을 쓰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문자를 쓸 때는 알파벳 80자의 용량 제한이 주어진다. 하지만 한글 40자는 내 말을 전하기에 너무 적다. 정신없이 쓰다보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쓰지 못하고 제한에 걸리기 일쑤다. 그럴 때는 다시 퇴고의 작업을 거친다. 필요 없는 말은 빼고, 더 간단한 말로 교체한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조금만 끙끙대다 보면 한 문자 내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용량의 압박감 속에서도 이모티콘을 절대 빼놓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아무런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메마른 문자를 바라봐야하는 상대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대방의 가슴은 메말라버린 걸까. 내게 돌아온 답장은 단 4bite뿐이다. ‘ㅇㅇ’



흔히들 현대 사회가 정보의 발달로 인해 주어진 황금기라고 칭한다. 크게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변화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사람들 간의 접촉 가능성이 너무나도 확대된 탓에, 오히려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져 가고 있다. 현대의 접촉은 전자파를 통한 정보 전달에 기반 하여 정의된다. “우리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로 대변되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오히려 우리는 핸드폰이라는 벽을 세운 셈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측량기사가 두 형제의 땅을 측량 실습한답시고 그 중앙에 줄을 친다. 사이가 좋던 두 형제였지만, 이 줄이 발단이 되어 조립식 벽을 세우고, 망루를 세우고, 나중에는 총까지 사서 서로를 위협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벽을 허문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술의 진보를 등에 업은 총의 힘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날아온 민들레 꽃씨의 편안함이었다. 우리도 핸드폰으로 편리함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맞잡고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로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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