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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탓치 2009. 3. 9. 20:31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내가 익히는 정보라고는 제목, 장르, 감독의 이름 뿐이다.
대략의 줄거리만 들어도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볼만한 영화'를 찾기 위해 예고편을 섭렵하는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인데, 난 오히려 기대하지 않고 보았던 (조악한 포스터를 보면서 긴가민가했던) 영화 중에서 주옥같은 작품을 찾아낼 때의 그 쾌감을 즐긴다.


하지만 원제 <The curious case of Benjamine Button>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접한 영화이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같이 이 영화를 봤다고 해서, 큰 기대를 품고 보게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볼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예고편 또한 이미 본 상태였다(자그마치, 예고편을!). 남들과 다른 시간을 걷는 남자의 이야기라니. 이 영화는 소재가 워낙 특이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 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세븐(1995)>과 <파이트클럽(1999)>를 만들었던 감독, 데이빗 핀처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라 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내가 생각한 영화의 흐름은 두 가지였다.
확실히 남들과는 다른 한 남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SF적인 반전을 줄 것이 분명했다. 전자와 같은 방식은 다소 무료할 수 있으나, 오히려 톰 행크스가 열연했던 수작 <포레스트 검프(1994)>처럼 가슴 쿵 내려앉는 감동을 줄 수 있을터였다. 아니면 윌 스미스 주연의 <헨콕(2008)>처럼 다름에서 조화로 나아가는 듯 하다가 갑자기 천사(!)와 같은 SF적인 요소가 - 사실 날아다닌다는 설정도 - 등장하여 관객의 혼을 빼앗을 법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애절한 삶을 그대로 풀어내는 영화를 더 선호한다.
남들은 엘리트 코스라고 부르지만 부모님에, 학교에, 주위 시선에 옭아매여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그런 '독특한' 삶을 요약해서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곤 했다. 내가 어떻게 초원이를, 엔디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말아톤(2005)>과 <쇼생크 탈출(1994)>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이 감독의 과거 영화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강한 무언가를 심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의 시작은 병상에 누운 할머니와 나이든 딸의 대화. 폭풍이 몰려온다는 뉴스는 계속 반복되고, 떠나보냄에 익숙한 간호사는 진통제를 놓느라 정신이 없는 병원의 모습이다.

주인공의 독백이란 도구는 상당히 쉬우면서도, 한편으론 어려운 전개방식이다.
이런식의 말장난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 다시 한 번 명확히 표현하겠다. 독백을 첨가한 이야기는 흐름을 이끌어가기는 쉽지만 어디까지나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끝나야한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해왔던 연극만 봐도 그렇다. 1학년 때 세익스피어의 작품 <뜻대로 하세요>를 무대에 올렸는데, 이 작품엔 - 예전 연극이 그렇듯 - 독백이 상당히 많았다. 주인공이 독백을 할 때는 주위 등장 인물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은 관객과 배우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 독백은 그 상당한 길이에도 불구하고 극 흐름에 전혀 문제를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등장인물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극의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벤자민~>은 주인공의 독백을 많이 사용한다.
160분 이상의 긴 영화흐름이지만 한 인물의 평생을 다룬 영화이니만큼 굵직굵직한 에피소드를 묶어 보여주었다. 이는 <포레스트 검프>와도 같은 점이다. 즉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과 장소의 변화를 주인공의 독백으로 알려주고, 이 다음에 자연스럽게 장면 전환을 유도하는 식이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주인공 마이클이 버스를 기다리면서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는 설정이었고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에서나 이를 알게된다.) <벤자민~>에서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둔 여자가 벤자민의 일기를 소리내어 읽는다.


확실히 벤자민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자라온 집 자체가 양로원인 탓에 자신의 겉모습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겉으로 확실히 드러나는 특징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은 벤자민을 그저 할아버지로 보았다.) 차별 또한 받지 않았던 것 같다. 만일 일반 가정에서 자랐다면 친구들과는 다른 모습 때문에 스트레스를 매우 받았을 것이고, 죽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까.


영화는 다르기 때문에 겪어야될 차별의 아픔 보다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늙을 수 없음을 슬퍼하고 있다.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 이것이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의 '바보같은' 행동을 보며 슬퍼하고, 웃고, 아파하는 것이 관객이었다면, <벤자민~>에서의 슬픔은 오롯이 벤자민의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시종일관 착 가라앉아 있다. 많은 것을 담은 브래드 피트의 눈빛은 가슴 아렸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밖에서 뛰노는 동갑내기 아이들을 보며 휠체어를 탈 때도 그렇고, 자신의 아버지가 Mr. 버튼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도,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아이를 위해 '진짜 아빠'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도 그의 슬픔은 너무 절제된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벤자민의 처지에 몰입한 내가 슬픔에 면역되어선지, 아니면 오히려 슬픔을 담담하게 풀어나가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의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가 끝날 때 벤자민은 - 끝까지 -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Some people were born to sit by the liver.
Some is struke by the lighten, some have ear of music,
some are artists, some swim, some know buttons,
some know Shakespeare, some are mothers,
and some people dance."

벤자민 버튼의 일생을 보여주는 주마등이다.
이 때가 되서야 나는 깨달았다. 영화는 우리에게 슬픔을 강요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모닥불 피워놓고 삶을 풀어내는 할아버지와 마주한 듯, 거꾸로 가는 시간 앞에 스러져간 한 남자의 일생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눈물을 보이고, 가슴을 쥐어뜯었다면 나는 그 눈물만을 기억했으리란 사실을. 강렬한 자극과 급격한 변화를 기대했던 내가 예전 '가시고기'를 본 뒤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있음을.


가끔은 한 가득 눈물을 흘리는 슬픔보다 가슴 먹먹한 아련함이 더 슬플 수도 있음을 잊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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