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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9 - 요하네스버그 상공의 우주선

탓치 2009. 10. 29. 02:12


지구로 날아온 또 하나의 외계인 종족

사실 할리우드의 외계인 사랑은 지극하기 그지 없어서 지금까지 나온 외계인의 종류도 다양하다. <에일리언(1979)>부터 자그마치 네 편이 이어진 에일리언 시리즈와 <프레데터(1987)> 시리즈, 그리고 심지어는 그 둘을 맞붙게 만든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시리즈까지. 최근 들어서는 굵진한 목소리에 눈이 돌아가도록 멋진 변신장면을 선사한 옵티머스 프라임이 등장하며 새로운 '종류'의 '외계인'을 선보였다. 성관계로 지구를 정복한다는 새로운 공식을 제공했던 <스피시즈(1995)>도 있었고, 머리 큰 우리의 영원한 친구 <E.T(1982)>에 온 몸에서 빛이 나는 신비한 모습의 외계인을 잠깐 내보였던 <A.I(2001)>도 기억에 남아있다.

왜, 어째서 레드오션이다 못해 발디딜틈 없는 외계인이란 소재를 이렇게 쓰고, 쓰고, 또 쓰는 것일까. S.E.T.I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인간의 외계에 대한 무지와 희망을 증거한다. <이끼>의 윤태호 작가가 절찬리 연재중인 <세티>에서는 "이 우주에 지적 생명체는 우리밖에 없다면 이것은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 하나에 또다른 외계생명체의 존재에 대한 기대감이 모두 담겨 있다. 결국 똑같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영화를 만들어도, 충분히 소비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외계인의 방문은 오로지 침공 뿐이다?

<스타쉽 트루퍼스(1997)>의 벌레들이 그랬고, <우주전쟁>의 화성인 이웃들이 그랬다. 그들이 지구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보다 분명 기술이 우위에 있다는 걸 뜻하고, 결국 우리 '살기좋은' 지구를 정복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외계인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공식과도 같았다. 이제 외계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더 멋진 효과, 더 자세한 외계인의 묘사(징그러울수록, 자극적일수록 좋다), 더 잔인한 결투씬에 공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왠걸, 오늘의 영화 <District 9(2009)>은 손바닥 뒤집듯 내 기대를 엎어버렸다.

D9의 홍보 전략은 유효했다. 미국의 영웅 문화와 냉전 시대의 종결을 버무려 만든 감짝 놀랄만한 영화 <왓치맨(2009)>이 한국에 넘어오면서 한낱 '과거 영웅이었던 자들을 암살하려는 음모에 대항하는 노쇠한 영웅들의 분투기'로 평가절하되었던 것처럼, 외계인에 인권을 대입시킨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D9은 단지 지구에 떼로 몰려온 외계인들과 인간들의 사투인 것처럼 묘사되었다. 홍보 담당자들은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2009)>의 홍보 때와 마찬가지로 영화 내의 전투씬을 적절히 섞어 예고편을 만들고, 우리에게 자그마치 112분에 달하는 시간동안 계속 쿵쾅거리며 싸워줄 것이라고 기대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월 들어 삼성 COEX에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들은, 신사동 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들은 '외계인 관람금지' '외계인 출입 금지'라는 큼지막한 포스터를 보았을 것이다. 흰 바탕에 왠 요상하게 생긴 외계인이 그려져 있고, 자극적인 빨간색으로 금지 표시가 되어있다. 그리고 자, 이제 문제의 문장이 나왔다. 'For human only' 새로운 차별의 시작이다.

차별과 기피로 얼룩졌던 과거

어느 나라든 지간에, 내보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음은 분명하다. 특히나 국가이미지가 글로벌 경쟁력의 주요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요즈음은, 누구나 장밋빛 미래와 유구한 역사를 강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역사가 자랑스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많고 많은 과거의 얼룩 중에 D9와 관련지을 수 있는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인종 문제를 들겠다. 피부색, 머리카락의 곱실한 정도, 키와 외양의 차이가 유별나지 않은 아시아권과는 달리, 다른 문화에서는 인종 문제가 언제나 대두되었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1862년 여름, "미국 의회가 남부에서 연방군의 영토로 도망친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던 그 날 이전에는, 흑인이 차별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 이후로도 1886년 창설한 KKK단이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흰 두건을 뒤집어쓰고 흑인에 대한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고, 인종 차이가 곧 지배 구도를 만들어낸다는 논리로 백인의 우월함을 주장했다. 2009년 1월 미국 대통령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당선되는 이 날까지, - 비록 그가 유년 시절을 외할아버지가 속한 백인사회에서 보내 백인들의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다고는 하나 - 흑인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어져 왔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White Only'이다. 실제로 남아공에서 사용되었던 이 정책은, 대상이 수도꼭지든 버스든 가게든지 간에, 백인과 흑인의 사용처를 분명히 나누었던 방식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흑인이다. 어느 날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수도꼭지 위에 'White person only'가 떡하니 붙어있다. 만일 이 수도꼭지를 사용하다가 성질 나쁜 백인을 만난다면 두들겨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D9의 human only와 남아공의 white only

시민단체의 감시의 눈은 인권 보호에 있어 필수적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인권단체들조차도, 20년 전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 아, 장소 선택의 탁월함이란! -  거대 우주비행선이 멈춰서고, 백만 명이 넘는 외계인이 쏟아져 나왔을 때 당혹스러웠으리라 믿는다. 혹은 그들의 발언권이 강화될 절호의 기회라고 기뻐했을 수도 있겠다.

세계와 인종의 개념을 좀더 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외계는 결국 한 우주 내에서의 이웃일 뿐이고, 외계인은 '피부색, 머리카락의 곱실한 정도, 키와 외양의 차이'가 다소 많이 차이가 나는 다른 인종일 뿐이다. 이런 해석 아래, 외계인은 요하네스버그 시내, 외계인 수용구역인 D9에 모여살게 된다. 난민촌과 같은 개념인데, 결국 슬럼화가 진행되고 시민들은 폭동 직전까지 정부를 몰아세운다. 멕시코에서 넘어오는 불법이민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선동했던 <아메리칸 히스토리 X(1998)>의 데릭처럼, 시민들은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우선하는 매우 '이성적인' 판단을 행했다.

결국 이 영화는 인권 보호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제 이윤 챙기기 급급한 우리들의 모습을 아주 효과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인 '외계인'으로 보여준다. 외계의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사위를 팔아먹는 사람과, 인체 실험을 당하고 처참히 버려진 동료들의 시체를 보고 고개를 떨군 크리스토퍼의 모습 사이에서, 어느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도덕적인 인간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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