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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Minutes, 2007)> 그 조악하고 허술한 이야기

탓치 2009. 10. 28. 04:31
<2008년 모월 모일>

절친한 동생과 함께 룰루랄라 극장으로 향했을 때,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개봉일을 잘못 알고 왔던 것일까. 제시카 알바 주연의 디아이를 보고자 극장을 찾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영화 목록엔 없었다. 그렇다고 동생과 함께 위 오운 더 나잇을 볼 수는 없는 일. 결국 두 명 다 보지 않은 88분을 보자고 합의를 보았다.

예고편에서부터 스릴러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는 88분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릴러가 될 수 없다. 요즘은 하도 다양한 소재의 영화가 많이 나와 어디까지가 스릴러인지 잘 모르겠다만, 만일 관객에게 긴장감과 스릴감을 주고, 가끔씩 보너스로 반전까지 덤으로 얹어주는게 스릴러라면, 이 영화는 실패한 스릴러다.

누군가의 피땀얽힌 결과물인 종합예술, 영화를 부족한 내가 이리재고 저리재고 독설에 가까운 평을 내리는 건 어찌보면 건방져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7000원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기대한 사람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내보이지 못한 영화이기 때문에 얼마간 욕을 해도 좋을 것이다.

'범인은 눈 앞에 있다' 이제는 너무도 식상한 진실아닌 공식.
관객이 된 나는 이미 주인공의 주위에 범인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불가항력. 요새 영화가 다 그렇듯이, 결국 주인공이 잡고자 하는 '그놈'은 의외의 인물로 판별날 게 뻔했다. 나는 그 뻔한 사실을 어떻게 요리조리 요리하여 나에게 놀라움과 환희를 안겨줄 것인가를 기대했을 뿐이다. 반전영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식스센스를 볼 때, 나는 반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호흡을 따라가며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아예 반전을 기대하지 못했던 영화에서 놀라움을 느꼈을 때의 그 기쁨이란. 메멘토를 보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결론에 놀랬다. 나는 88분에서 그런 강렬함을 원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내 잘못만은 아니다. 이미 영화 홍보에서 범인은 눈 앞에 있다느니, 시간이 지날수록 범인은 가까워진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왔고 (물론 홍보효과를 노린 것이겠지만) 거르고 걸러서 들어도 긴장감있는 영화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긴장감, 그 뿐이었다.
러닝 타임 88분 동안 두근두근 거리며 범인이 누굴까 눈을 한층 부릅뜨고 살펴보았지만, 결국 나에겐 실망감만이 남겨졌다. 영화 초반부터 대놓고 보여주는 바람에 '저놈은 범인이 아니구나.' 혹은 '저놈은 미끼구나' 라고 눈치채버린 건달 녀석을 재하고, 의구심에 불타 살인자(혹은 살인 용의자)를 인터뷰하고, 수업시간에 바륵바륵 대들던 남자 녀석은 너무 올곧아 보여 범인에서 재했다. 그러니 세 명의 여자만이 남았다.

감독은 많이 노력했다고 본다. 분명히 주인공의 조교 역을 받은 배우에게 '최대한 의심스럽게 행동해라' 라고 했을 것이고, 별 중요하지도 않은 학장 역에겐 '최대한 중요한 역인 것처럼 행동해라' 라는 둥의 요구를 했을 것이다. 이 두 배우는, 아니 역할은 관객을 홀리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었을 뿐, 전혀 용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 두 사람을 너무 의심하다 보니 딱 한 사람이 남더랬다. 애초에 카메라의 앵글이 (영화로 보자면 주인공의 시선이) 위 다섯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었으니 딱 한 사람이 남는다. 그 사람은 전혀 의심받을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영화 중반에는 아주 대놓고 '나 범인 아니오' 라고 선언을 해버린다. 다섯 사람들 중 유독 한 사람만 의심을 벗어난 것이다. 결국, 여기서 결론이 나버렸다. '아 이 녀석이구나.'

만일 감독이 짜임새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영화를 짜임새 있게 찍었다면 의심을 벗어났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다른 사람이 의심스러웠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대놓고 보호하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이상 바보가 아닌 관객의 눈을 피해 진짜 범인을 감추려니 증거를 감추는 수밖에 없고 (몰래 내보이기 무서웠던 것일까) 복선이라고 볼 수 없는 등장인물의 성적 정체성을 이용해서 불가능해보이는 테이프의 탈취를 설명한다.

폭발물 경보를 울려 대학을 비우고 범행 현장으로 이용하는 센스야 칭찬해줄만하지만 어떻게 범인이 두 사람을 끌고 7층까지 올라갔는지 (단지 총으로 위협해서?) 요원은 왜 하필 반대편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는지(타이밍에 맞춰서 총을 쏘았나?) 전혀 설명해주지 않은채 영화는 끝나버렸다. 정말 억울한 것은 주인공이 '이 사람이 범인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 살인용의자를 방문했던 사람들의 신상기록을 살피고 나서라는 것이다. 복선이 없는 반전영화였던 거다, 88분은.

여러 면에서 찝찝함만을 남겨준 영화였다. 88분은 설명조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복선이 턱없이 부족했달까. 아니면 내가 찾지 못했던 것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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